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문단 편집) ==== 추방 ==== 하지만 재판 없이 카틸리나를 지지한 고위급 인사들을 처형하고 차석 집정관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에게 군 지휘권을 부여해 카틸리나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일소한 일은 안 그래도 시큰둥했던 로마 시민들의 반응을 한층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상술되었다시피 안 그래도 이 조치는 민중파의 정책을 내세웠던 카틸리나를, 고의로 그의 선거활동을 키케로가 방해하는 형태로 치러졌으며 그 결과 카틸리나가 낙선했고, 그 뒤 재판에 회부한 게 아니라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카틸리나를 처형한 데다가, 정작 카틸리나가 정말로 폭동을 일으키리라는 증거도 미흡한 상태였다.] 그 결과 키케로는 집정관에서 퇴임하던 날 호민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기원전 57년 집정관)|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의 거부권 행사[* 이 시기 폼페이우스 파벌에 속했던 네포스의 거부권 행사엔 정략적인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그 무렵 동방 원정을 마무리 짓고 귀국할 채비를 하던 폼페이우스는 카틸리나의 반란으로 도래한 혼란을 수습하겠다는 명분을 이용해 특별 직권을 부여받고 로마로 귀환하려 했으나 자신이 이룬 공적의 빛이 바랠 것을 우려한 키케로의 반대에 부닥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네포스의 거부권 행사는 재판 없이 로마인을 처형한 일에 대한 반대의 의미 외에, 카틸리나의 반란을 빌미로 특별 직권을 확보하려 한 폼페이우스의 시도를 좌절시킨 일에 대한 앙갚음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와 군중의 흉흉한 분위기에 떠밀려 관례적인 퇴임 연설조차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또한 카이사르는 카틸리나 처형에 대한 항의의 의미에서 과거 사투르니누스를 즉결처분한 일에 가담한 이를 고발함으로써 여전히 키케로가 확대 적용한 원로원 최종 결의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음을 암묵적으로 주장했다. 더욱이 기원전 60년에 접어들어 과거 여자들만 참석이 허락된 보나 데아 축젯날, 그날만은 금남의 장소여야 할 대신관 관저에 침입하려 했다 발각되는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는 대형 스캔들을 일으켜 기소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일을 계기로 키케로에게 앙심을 품고 반목하게 된 파트리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본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카틸리나에 대한 논쟁이 한창 들끓던 시절 키케로를 호위하는 무리에 가담하는 등 키케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가 호민관이 되겠다는 목적에서 평민으로 신분을 바꾸려 하는[* 파트리키에게는 호민관직에 대한 피선거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한편 재판 없이 로마 시민을 처형한 그를 기소하겠다고 위협하자, 본격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행위를 정당화할 필요성을 느낀 키케로는 집정관 재임기에 한 연설문을 다듬어 책으로 출판한다.[* 이 말은 곧, 현존하는 카틸리나 탄핵문은 키케로가 원로원 회의에서 입에 담은 말이 아닌, 그것을 기반으로 다듬어지고 보강된 글임을 시사한다. ~~요컨대 자기변명.~~] 그러나 이듬해인 기원전 59년, 과거 키케로의 동료 집정관이었으며 키케로에 의해 군 지휘권을 부여받아 카틸리나 무리를 일소한 안토니우스 히브리다가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해 각종 만행을 저지른 대가로 고발당하자, 히브리다에게 유죄가 선고된다면, 이를 발판 삼아 자신을 공격하는 인물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 혹은 그렇게 판단한 키케로가 직접 히브리다 변호에 나서나 패소하고 만다. 히브리다에게 유죄가 선고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과거 카틸리나를 지지했던 많은 이들은 환호했고 심지어 카틸리나의 무덤엔 꽃다발이 바쳐지는데, 키케로의 집정관 재임기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 그의 정적이었으며 그의 주도하에 제거된 카틸리나에 대한 우상화로 이어졌을 가능성 등을 고려해야 하므로 이러한 반응을 해석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겠으나 이 일은 당시 그 무렵 키케로가 필사적으로 정당화하려 한 카틸리나 탄핵 및 제거 나아가 그의 집정관 재임기에 대한 로마인들의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준다. 설상가상으로, 키케로는 법정에서 히브리다를 변호하던 중 여러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데다 승소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 때문인지 평정심을 잃고 그 무렵 자신에게 압박을 가하던 카이사르를 위시한 삼두를 거명해 공격하고, 이 소식을 접한 카이사르는 당일 로마의 최고 신관 자격으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평민으로의 입양을 승인해버린다.[* 이후 풀케르는 평민의 2작명법에 따라 귀족의 3작명법에 따른 이름을 대신해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로 개명한다.] 이후 호민관으로 선출된 클로디우스는 해가 바뀌고 자신의 임기가 시작되자 재판없이 로마인의 목숨을 앗아간 이를 추방하는 법안[* 정확히는 'aquae et ignis interdictio'로, 물과 불의 사용을 금하는 법안이었다. 로마법에서 물과 불의 사용을 금한다는 것은 그 인물을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 처분을 받았음에도 마을에 남아있다면 법에 의한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법외자 취급을 받았다.]을 발의하면서 키케로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위기에 직면한 키케로는 도시를 배회하며 도움을 간청하나 옵티마테스를 위시한 당대 로마 정계의 실력자들은 신참자인 키케로를 위해 발 벗고 나설 생각이 없었기에 형식적인 움직임만을 보였고, 일반 시민들은 클로디우스가 제정한 곡물법에 수혜를 입은 데다 집정관 재임기 경제 문제엔 대응책을 내놓지 않고 카틸리나의 죄를 입증하는데 골몰한 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유일한 희망은 폼페이우스의 지원이었으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도 손을 잡으면서 최후의 희망조차 사라져버렸다. 키케로는 로마에서 정식으로 기소되기 전에 로마를 떠나는 것으로 유죄 선고를 받고 정치적 생명이 끊어지는 일만은 면하려 했으나, 그의 정적들은 그를 기소하지 못하게 되자 법적으로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를 국외 추방하는 안건을 통과시켜 키케로의 정치적 생명을 끊어버렸다. 키케로는 이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전성기의 위세를 되찾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 절망한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살을 하려 했으나 자네의 청원으로 간신히 단념했네... 그러나 내 미래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라고 쓸 정도로 크게 낙담하였다. 하지만 로마의 정국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듦에 따라 키케로는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 로마에선 클로디우스를 중심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갈등이 전면에 대두했고, 당시 클로디우스 및 그를 후원하는 크라수스와 반목하던 폼페이우스는 언변으로 자신을 방어 및 상대를 공격할 인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의 귀환에 마뜩잖은 반응을 보이는 카이사르를 최대한 달랬으며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직감한 카이사르는 '향후 자신들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아 폼페이우스의 의사에 동의한다. 그러자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에 대한 국외 추방령을 무효화하는 법안을 발의해 클로디우스를 제외한 대다수 의원의 동의를 얻어 통과시키는 데 성공, 키케로는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로마로 귀환한다.[* 키케로는 귀국 2년쯤 후에 쓴 《스토아 학파의 역설》(Paradoxa Stoicorum)에서 '어리석은 자는 모두 미쳐 있다'라는 명제를 논하면서 그 예시로 클로디우스를 들어 그를 신랄하게 디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